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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기자]
▲ 낙서재 일대. 그의 아들이 기거할 곡수당과 그 아래 인공 연못들이 보인다. 이곳의 경영이 대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이병철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섬 보길도 바다신게임 는 다리로 건너가지만, 그 다리가 이어진 노화도는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지난 10월 29일 아침 일찍 해남 땅끝마을에서 배에 올랐다. 결박도 없이 갑판에 얹어둔 오토바이 걱정이 무색하게도 파도는 순했다. 때 묻지 않은 햇살이 선실 유리창을 그대로 넘어와 내 몸을 지그시 누른다. 얼마 되지 않는 풋잠을 잤다. 이젠 섬을 잇는 다리가 너무 많아 뱃길이 아쉬울 골드몽릴게임 정도인데, 이날 같은 경험은 그래서 귀하다. 섬을 높고 둥글게 감싸는 산줄기 속 깊이까지 계곡 길이 이어졌다. 그 계곡이 끝나는 곳 양편 산자락에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마주 보고 있다. 마주 본다지만 이 산에서 저 산의 거리다. 가리는 시야가 없어 이웃일 뿐이다. 평시 기거하던 낙서재는 좀 낮은 곳에, 정신 세계의 수양 릴게임바다신2 처였던 동천석실은 산 중턱보다 높이, 커다란 바위 위에 올려 두었다. 일생 중 16년의 유배 생활을 가벼운 통과 의례쯤으로 여긴 고산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병자호란 끝에 당한 임금의 치욕은 충격이었나 보다. 현실이란 것에 대한 마음을 접고 멀리 제주도로 가려던 그의 눈에 기적처럼 보길도가 들어왔다고 한다. 바다이야기꽁머니상상을 넘어서는 그의 이상향 ▲ 낙서재. 고산이 살 때는 초가지붕이었지만, 후손들이 기와를 신천지릴게임 올렸다고 한다. 서북향으로 앉아 있어 아침이 좀 늦겠으나, 저녁 해 역시 늦게까지 들어 따뜻할 것 같다. 그가 명을 달리한 곳이다. ⓒ 이병철 그리고 그의 일생과 후손 대까지 보길도를 그와 가문의 이상향으로 경영했다. 무릉도원이나 십승지의 현실판처럼 좁은 계곡 입구를 찾지 못하면 그의 세계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정작 윤선도 본인은 감출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객을 맞이하고 어울릴 장치를 계곡 입구 세연지 일대에 거하게 만들어 두었다. 무희들까지 불러들여 춤사위를 풀어헤칠 석무대까지 만들어 둔 것은 이미 내 상상력을 넘어 버린다. 우선 계곡의 끝 낙서재 영역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평시 고산의 주거지인 낙서재는 물론, 그 아드님이 기거할 곡수당, 강학 공간인 서재 등 몇 동의 기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사이사이 흐르는 물을 이용해 인공 폭포를 만들고 연못을 팠으며 다리를 놓았다. 고산 자신은 낙서재 앞 커다란 바위를 귀암(龜岩)이라 이름하고 그 위에서 달빛을 받고 차를 마셨다 한다. 고사에서 따온 이름들을 주변 풍광에 붙이고, 자신의 이상향을 좇았다. ▲ 귀암. 낙서재 앞 마당에 있다. 고산의 달맞이 장소로 전하며, 이 바위의 발견이 일대의 원형복원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안내판은 전한다. ⓒ 이병철 퇴계 이황은 그가 말년을 보낼 세 칸 반짜리 도산서당을 짓기 위해 그리 애를 썼다. 이는 선비의 공간이 곧 정신의 형상이란 뜻이다. 고산은 건물과 주변 사물 하나에도 자신의 내면 질서를 새겨 놓으려 했던 것 같다. 더불어 그가 일군 원림은 모두 결국 그 마음의 투영이었다. 낙서재 마당에서 바라보면 저기 앞쪽 동천석실이 올려다 보인다. 커다란 바위 사이에 마치 독수리가 둥지를 틀 듯 들어선 두 동의 건물. 이렇게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세월이 빠른데 언제 저기까지. 그동안 많은 탐방객들이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매표소 관리자 분은 나 말고도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길도 와서 동천석실에 가지 않는 것은 3분의 1은 놓치고 가는 겁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요. 꼭 가세요." 솔직히 그 말을 듣지 않았으면 난 보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귀 얇은 내가 어찌 저항할까. 오토바이를 석실로 가는 숲길 입구쯤에 세우고 신발 끈을 조였다. 동백나무 숲인가? 활엽수로 울창한 섬 숲이 이리 어둡고도 선명하며 향기로운지 처음 알았다.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님에도 맑은 공기에는 향내까지 묻어 있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듯 계단 하나 없는 그 길이 험하긴 해도 좋은 길임에는 분명했다. ▲ 동천석실. 산 중턱을 더 올라 바위절벽 위로 두 동의 건물을 올렸다. 아래는 휴식처로, 위는 독서처로 했다고 한다. ⓒ 이병철 차원이 다른 공간 문득 뭔가 떠올랐다. 어차피 낙서재, 세연정 일대, 동천석실 세 군데 아닌가. 그중 하나를 빼면 3분의 1을 놓치는 것이 당연한 건데, 왜 그 3분의 1이라는 것이 그리 무겁게 다가왔던 것일까. 3분의 1이란 객관적인 숫자의 무게가 아닌, 조금이라도 잃으면 전체를 잃는 것 같이 느껴 버리는 범인(凡人) 특유의 욕심이 발동된 까닭일 것이다. 헉헉대는 숨소리 속에 헛헛한 웃음이 섞여 나왔다. 그 말의 무게는 허언이 아니었다. 능선 아래 절벽 두 군데에 놓인 사방 한 칸씩의 석실은 그것 자체로 명물이었다. 위쪽은 독서와 사색을 위한 공간, 그 조금 아래는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 했다. 바위 사이로는 인위적으로 돌을 깨고 조성한 연못과 다리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소위 '차원'이 다르다. ▲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낙서재 영역. 동천석실의 처마 밑에 서면 낙서재 영역이 이리 보인다. ⓒ 이병철 그렇잖아도 높은 산속, 수직 절벽 위에 이리 해 놓은 이유는 뭘까. 석실 앞 좁은 마당에 앉았다. 잠시 그가 되어 본다. 가파른 길을 오른 그가 이곳에서 한숨을 쉰다. 숨을 고르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저 멀리 육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의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으리라. 그의 눈에 저 아래 낙서재와 일군의 건물이 보였다. 그 안에 들 때는 꽤 넓게 지었지만, 이곳에서 보니 아이들 두꺼비집 같다. 드물게 오가는 사람들도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그로써 그는 잠시나마 현실의 보잘것없음에 위로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갑자기 그의 마음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역사의 체험이란 것이 때론 이리 버겁다. 남도답게 10월의 숲은 푸르고 울창했다. 마치 마고할미가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끌어안은 형상이다. 그 양 팔뚝 위에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있고, 마주 모은 손쯤에 세연정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북쪽을 향하고 있으니 서러운 육지 것들을 언제든 따뜻이 품어줄 태세다. 처음엔 윤선도의 재력이 부러웠으나, 이젠 이곳을 찾아낸 그의 눈이 부러워진다. 석실에서 내려와 계곡 입구로 다시 내려왔다. 세연지 연못은 그가 조성한 원림의 입구이자 가장 원림다운 곳이다. 뛰어난 풍광의 자연 계곡을 인위적으로 다스리고 온갖 기묘함을 노출시켰다. 원래 좁은 개울이었겠지만, 바닥 암반을 따라 확장해 넓히고 돌로 축대를 쌓았다. 그 암반은 또 거대한 바위들을 품고 있어, 마치 큰 바닷속 고래 떼들이 힘차게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모습이다. ▲ 세연지와 세연정. 고산은 보길도 계곡(부용동)으로 드는 입구에 연못(세연지)을 조성하고 정자를 세웠다. ⓒ 이병철 무희들을 위한 석무대가 두 군데 있고, 연못에 면해 커다란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세연정인데, 마침 금하고 있지 않아 마루 위로 올라본다. 오토바이 부츠에 갇혀 있던 발이 시원한 마룻바닥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그 옛사람들처럼 앉아도 보고 누워도 봤다. 팔짱을 끼고 기둥에 반쯤 기대어 연못을 바라보기도 했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소위 요즘 말로 '힙(Hip)'했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그리 느낄 것 같다. 원림에 바로 붙어 이웃한 보길초등학교 학생들은 이곳을 보고 겪고 자라며 어떤 정서를 가지게 될까. 어릴 때 이런 자연과, 그 탁월함을 경험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분명 삶의 소음을 견디는 힘이 남다를 것이다. 현대의 도시 문명은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아무튼,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이 이곳 출신임은 평생 자랑거리일 것은 분명하다. 현실의 깊은 절망 속에 태어난 꿈 ▲ 세연정에 올라 바라본 모습. 나그네의 마음을 잘 풀어줄 것 같은 풍광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졌을 많은 일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 이병철 아마도 고산이 이곳에서 그린 이상향은 달리 보면 현실 도피일 수도 있다. 망국의 지경을 당한 수많은 지식인이 그렇듯, 현실 저 아래로 깊게 침잠해 들어갔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보길도는 상처 입은 그의 시대를 견디기 위한 훌륭한 방어막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상향이란 것은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 덕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다행히 그에게는 이곳을 알아본 눈과, 이상향을 경영할 능력과 재력이 있었다. 덕분에 오늘의 우리들은 좀 더 윤택할 수 있고, 우리에게도 이런 고급 문화가 있었음에 경탄할 수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일부 왕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그곳에서의 결사항전을 꾀했다. 고산 윤선도 역시 이를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강화도는 후금군에게 무너졌고,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왔다. 고산은 강화도에 들 수 없었다. 이후 고산의 삶은 보길도에서 이어졌고, 낙서재에서 명을 다했다. 처음엔 너른 섬 하나를 통째로 원림으로 만든 그의 재능과 미의식과 무엇보다 그의 재력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천 길 절벽 위 동천석실에서 느꼈을 그의 감정은 내 호기심과는 궤가 달랐음을 깨달았다. 원림을 빠져나와 다시 노화도를 거쳐 이번엔 완도로 건너가는 배에 오토바이를 실었다. 선실에 있지 못하고 갑판 위 선미로 나갔다. 멀어지는 섬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와 그들이 살아갔을 그 시대가 머릿속에서 또렷해졌다. 여전히 선실에는 들지 못한다. 이제 섬은 더욱 멀어졌다. 다음 다가갈 장소가 떠오른다. 온통 핏빛이었을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었던 또 다른 존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는 지금 1598년, 정유재란 당시 마지막 통제영이 있었던, 고금도로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