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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년이면 제주4.3은 80주년을 맞는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을 지나, 특별법 제정과 희생자 보상까지 성사되는 등 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그것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2월 5일부터 6일까지 열린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제5회 학술대회 '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는 4.3 연구의 2기를 여는 자리로 평가받을 만큼, 유의미한 내용들이 공유됐다. [제주의소리]는 독자들과 함께 4.3 80주년 이후를 함께 고민하고자, 4.3융합전공과 함께 제5회 학술대회 기조발제문을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프레임을 깨는 항쟁담론 바다신2릴게임 의 필요성 제주4.3은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새로운 나라에 대한 지향이었다는 점에서 항쟁에 어울리는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 다른 곳이 아닌 제주에서 분단과 친일파의 재등장에 대한 항쟁의 불길이 솟아올랐다는 것은 제주의 명예이다. (…) 그러나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서 그들이 피워 올린 봉홧불은 (…)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화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수행한 항쟁이란 (…) 단지 적들이 행한 악에 자기들의 악을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양쪽에서 쌓이는 악행으로 민중의 순수한 항쟁의 의지는 배반당했으니, 이것이 4.3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4.3은 배반당한 항쟁이다. 경찰의 학살과 고문에 맞 체리마스터모바일 서 일어난 항쟁이었으나, 더 큰 학살과 더 잔혹한 고문을 낳았고, 분단에 반대한 항쟁이지만 분단을 더욱 고착시킨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1) 진보적인 철학자의 이러한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면서도 현 단계 '제주4.3사건'(이하 '4.3') 연구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글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의 무장봉기에서 바다신릴게임 시작된 4.3사건은 항쟁 주체의 폭력에 대해 그것을 진압하는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만들어낸 미증유의 비극"2)임을 전제로 4.3은 정당한 항쟁이 갖추어야 할 폭력의 윤리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바로 '1948년의 4.3 봉기'에 초점을 두었음에서 기인한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이처럼 4.3 봉기에 방점을 찍음에 야마토게임다운로드 따라 그 항쟁 주체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이하 '제주 남로당')라는, 즉 제주 남로당이 이끌고 제주도민들이 거기에 호응한 항쟁이라는 관점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항쟁주체=(제주)남로당' 프레임은 애초에 반공을 내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짜인 것이기도 하거니와, 남로당 측에서도 자신들의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프레임에 동조한 결과이기에, 깨뜨려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는 그러한 관점을 집약한 텍스트이며, 항쟁론자들의 관점도 근본적으로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4.3항쟁에서 민중과 남로당은 공동주체였는데 남로당은 지도세력이었고 민중은 실질적인 주체세력이었다"4)는 민중항쟁론의 경우를 보면 제주민중의 역할이란 "봉화를 올리거나 지지선언을 담은 삐라를 살포하는 일들"5) 정도에 국한하고 있으니, 과연 이를 '공동주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항쟁의 주체세력인 남로당과 제주도민의 연대" 혹은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투쟁 전술과 제주도민의 관계"6)를 강조한 연구도 이에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 프레임 탈피를 촉구하는 김재용의 주장은 나아가 제주의 항쟁을 당시에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된 남북협상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제주에서의 "항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미-소로부터 벗어나 남북의 협상을 통해 단선을 막아냄으로써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이들"이라는 새로운 관점이다. 나아가 김재용은 "남북협상을 통한 단선반대운동이 제주의 항쟁에서 본류라고 한다면, 제주 남로당의 움직임을 그것의 한 지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7) 이는 4월 3일의 봉기 자체보다는 남북협상을 통한 5.10단선반대운동이 더 중요하다는 관점인 것이다. 아직은 시론(試論) 정도의 주장이지만,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사반세기를 앞두고 4.3 연구의 갱신이 요구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이러한 선행 연구에 주목하여 통일독립 항쟁으로서의 4.3의 성격을 부각하는 가운데 그 항쟁 주체의 활동상을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해방기에 전개된 남북협상운동의 양상을 재점검한 연후에 그것이 과연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분출하여 단선 무효의 성과물까지 획득한 제주의 항쟁과 어떤 상관성을 갖는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서 투표소의 모습 / 사진=오마이뉴스 2. 남북협상운동과 중도파의 위상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 문제가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는 와중에 1946년 3월 20일 출범한 미소공동위원회마저 표류하면서 통일독립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1947년 10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된 데 이어, 11월 14일에는 UN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에 의한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한국 독립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했으나 소련 측이 입북을 거부하였다. 곧바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노골화하고 남로당에서는 '2.7구국투쟁'을 벌였다. 그렇게 분단 위기가 고조되는 와중에 남북협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우파 김구와 중도파 김규식은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자는 내용의 서한을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2월 16일 발송했다. 이에 북측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터에 UN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면서 분단은 가시화되고 말았다. 그즈음 중도파가 민족통일운동으로 행동통일을 하는 가운데 3월 12일 김구,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김규식, 김창숙, 홍명희에 의해 '통일독립 달성을 위한 7거두 성명'이 발표되면서 대중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이 성명에서는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할 뿐이다. (…) 우리의 민족적 견지는불고하고 미소의 견지를 추수하여 해결하려는 것은 본래가 주객이 전도된 부정당하고 부자연한 일"이라고 역설했다.8) 익히 알려진 대로 7거두 중 김구와 김규식은 4월 26∼30일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과 가진 남북회담(4자회담, 남북지도자회의)의 주역이었다. 남북회담을 전후하여 김구와 김규식은 단선반대와 통일독립의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였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에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須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9) 우리의 목적을 달할 때까지는 우리의 일을 우리끼리 한다고 하고서 만일 남북회담이 깨진다고 하여 그때 가서 미국에나 소련에다 또 우리 독립을 지켜주시오 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남에서는 미에, 북에서는 소에 의뢰하고 독립을 기대해왔으나, 미소공위나 유엔에서 독립이 되었던가? (…) 인제는 막다른 골목이니, 한 번 해서 안 되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하여 생명 있을 때까지 하고야 말 것이며, 할 수밖에 없다.10) 이들은 분단을 온몸으로 막기 위해 38선 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념을 앞세우지 않아야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신념의 소산이었다. 특히 김규식은 친미반소와 친소반미 모두를 배격하면서 시종일관 좌우합작을 도모했다.11) 본래 남북협상이라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해본 것과 같이 만일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또 그들과 만날지 모른다. 정치라는 것은 꼭 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안 될 일이라도 필요하다고만 생각되면 해보는 것이다.12) 김규식은 6.25전쟁 기간 중 납북되었다가 사망하게 되는데(1950.12.10), 당시 그의 최후 발언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서로 화해하고 합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으로 해서 좌도 우도 아닌 중간 노선, 중립 노선을 확고히 견지해야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도 보장하고 통일도 이룩할 수 있다."13)였다고 한다. 통일에 헌신했던 중도파로서의 면모가 확인된다. 좌우합작을 선두에서 이끈 다른 인물로는 여운형이 우선 꼽힌다.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하면서 해방정국을 주도하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되는 비극을 맞고 말았지만, 좌우합작의 중심에서 통일독립에 헌신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다. 당시 그들은 "세칭 중간파가 아니고 중도파이며, 민세(民世 안재홍: 인용자 주)의 표현을 빌린다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앙당의 길을 걷고 있다고 확고히 믿었"으며 "기회주의적이라느니 팔방미인이라느니 나약하다느니 하는 비판과 욕설을 수없이 들었지만, (…) 불굴의 의지를 가진 독립투사요, 정치가"14)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극우-극좌 세력이 무력적이고 민족분열적인 통일을 지향한 반면, 중도파는 1948년 이후 남북협상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평화적이고 민족타협적인 통일운동을 전개"15)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마땅하다. 중도파야말로 "남북의 통일조건이 악화되고 계급적 대립이 심화되는 조건 속에서 탈이데올로기적-탈계급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민족통일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16)를 지녔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로선 중도파17)를 중심으로 외연을 확장한 남북협상운동이야말로 분단을 막는 유일한 길이었을 정도로 중요했다. 그것이 당장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남북협상운동은 '정의로운 바보'의 길이 되었는데, 이는 기미년 3.1독립운동의 경우와 같은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성과를 가까운 시기에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3.1독립운동이 평가절하 되는 일은 없는 것처럼 끝내 분단을 막지 못했다고 하여 남북협상운동을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우리한테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가지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까닭을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18) 해방기 제주의 항쟁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빛난다고 생각한다. 항쟁의 주체를 왜 제주 남로당에서만 찾는가. 당시 제주에는 좌와 우만 있었겠는가. 이념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분단된 정부보다 통일된 자주정부의 수립을 염원한 이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김동윤 1964년 제주 출생.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현대소설 전공으로 박사학위 취득. 2005년부터 제주대학교 교수로 근무. 제주대학교 인문대학장·탐라문화연구원장·신문방송사 주간 등을 역임. 류큐대학 인문사회학부 객원연구원 역임. 문학평론가로도 활동 중. 『작은 섬, 큰 문학』(2017), 『소통을 꿈꾸는 말들』(2010), 『제주문학론』(2008), 『기억의 현장과 재현의 언어』(2006), 『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2004), 『4·3의 진실과 문학』(2003), 『신문소설의 재조명』(2001) 등을 펴냄. 『김석범 한글소설집-혼백』(2021)을 엮어냄. * 이 글은 필자의 「통일독립 항쟁으로서의 4.3과 그 주체의 재인식」('영주어문' 제60집, 영주어문학회, 2025) 논문에서 일부를 덜어낸 후 수정-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1) 김상봉, 「폭력과 윤리: 4‧3을 생각함」, 전병준 엮음, '인문학, 정의와 윤리를 묻다', 후마니타스, 2020, 221∼222쪽. 2) 위의 글, 167쪽. 3) 김재용의 「남북협상의 단선 반대운동과 4.3 인식의 전환」과 「4.3의 통일독립과 비남로당계 항쟁 주체」가 그것이다. 이 두 글은 김재용‧김동윤, '4.3항쟁과 탈식민화의 문학', 소명출판, 2024에 수록되어 있다. 4) 고창훈,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최장집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308쪽. 5) 위의 글, 276쪽. 6) 양정심, '제주4.3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 선인, 2008, 22쪽. 7) "분단 이후 남한의 국가권력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 4.3항쟁을 남로당의 전유물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남로당이 자신들의 혁명 전략을 위해 이 항쟁을 일으킨 것처럼 호도하면서 정작 단선 반대를 외쳤던 제주도민들의 원동력을 지워버렸다. 이러한 인식이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침전되어 우리들의 의식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게 되고 만 것이다. 항쟁의 주체를 건드리려고 하면 상처를 덧내게 될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다소 기이한 현상마저 벌어졌다. 오랫동안 반공을 내세운 국가권력이 이러한 의식을 강제하였기 때문에 그 기이한 현상의 지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항쟁 주체=남로당'이란 프레임이 자리를 굳히게 되어 다른 틀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김재용, 앞의 책, 14∼15쪽) 8) 유진오, 김기림, 정지용, 염상섭, 이병기 등 문화인들도 4월 14일 108인 성명(「남북협상만이 구국에의 길」) 등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에 적극 동참하였다. 9)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浥告함」, 1948.2.10. 10) 「통일독립 자력으로 달성/ 양 김씨, 강경한 결의를 피력」, '조선일보' 1948.4.6.(인용 부분은 김규식 발언임.) 11) "일부 노선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친소 및 반미의 행동을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 자기네의 독점정권의 수립을 기도하였다고 평하는 이가 있으며, 또 일부 노선은 친미반소의 노선을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 일부 독점정권의 수립을 몽상한다고 평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 두 노선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입장을 망각한 것이며, 민족적 통일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좌-우 양익의 협조에 의한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을 저지하는 것이며, 미-소 양국의 조선에 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김규식, 「신년사」, '조선일보' 1947.1.4) 12) 「정부승인에 감사/ 민족진영 더욱 노력하라」, '민국일보' 1948.12.15.(김규식 인터뷰) 13) 서중석, '남북협상: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한울, 2002, 340쪽. 14) 위의 책, 16쪽. 15) 윤민재, '중도파의 민족주의운동과 분단국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4쪽. 해방공간에서의 중도파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세력이었다. "첫째, 외세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외세의존적인 태도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둘째, 평화통일과 외군철수 등 비폭력적인 통일관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셋째, 토지개혁, 정치구조 개혁 등의 문제에서 개혁주의적인 면과 함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절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넷째, 갈등과 대립의 해방정국에서 타협과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남과 북의 무력충돌을 피하고자 하였고, 식민지 잔재 청산을 통한 자주독립국가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다섯째, 좌우의 대립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취하기보다는 좌우를 결합할 수 있는 노선과 정책 개발에 노력하였다."(같은 책, 5∼6쪽) 16) 위의 책, 259쪽. 17) "해방 이후 조직화된 국내외 정치세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면 국내의 극좌, 극우 세력보다는 중도적인 정치세력의 분포가 상당할 정도로 넓지 않았나 하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남광규, 「미소공위와 미·소의 조선임시정부 수립 대책」, 이철순 편, '남북한 정부수립 과정 비교: 1945∼1948', 인간사랑, 2010, 302쪽. 18) 서중석-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오월의 봄, 2015, 10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