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답변
SCROLL
질문답변
|
카지노 사이트 강남룰렛 시스템 배팅 ㎯ ŔN᷆L͋1̍4͟3͎.ŢÖ́Ṗ ㎮ 에볼루션카지노 이용방법 및 쿠폰사용법
|
|---|
|
|
토토핫 ※ ŔN᷆L͋1̍4͟3͎.ŢÖ́Ṗ ω 바카라 카드해시게임 ㎧ ŔN᷆L͋1̍4͟3͎.ŢÖ́Ṗ ㈄ 마카오바카라게임추천인없는곳프라그마틱 순위 ▲ ŔN᷆L͋1̍4͟3͎.ŢÖ́Ṗ ┼ 호텔카미노스타논스톱카지노 ㈒ ŔN᷆L͋1̍4͟3͎.ŢÖ́Ṗ ╉ 바카라 시스템 배팅법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충남 부여 양화면의 유왕산 전경. 금강이 내려다뵈는 정자가 세워진 저 언덕 위에서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과 백제 대신들을 태운 배를 눈물로 배웅했다고 전해진다.
부여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겨울은 여행하기 좋지 않은 계절이다.” 겨울에는 약동하는 생동감도 화려한 색감도 다 사라지고, 칙칙한 무채색만 남는다. 발목을 잡는 거추장스러운 추위는 또 어떤가. 겨울 여행이 심심하고 칙칙한 건 반 이상이 색(色) 때문이다. 겨울에는 골드몽사이트 색이 없다. 꽃도 없고, 풀도 없다. 눈(雪)이 있긴 하지만 드물기도 하고 내려도 반짝 그때뿐이다. 강은 얼었고, 들은 황량하다. 색이 없다는 건 곧 ‘볼 게 없다’는 뜻이다. 불가(佛家)에서 색의 개념은 좀 다르다. 단순한 색채를 넘어 변화하고 소멸하는 물질적 존재를 말하는데, 나아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일반’이란 뜻으로 확장한다. 거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칠게 정리하면 불교에서 색이란 곧 ‘형식이자 치장’이란 의미다. 개념을 제멋대로 휘저어서 얘기해보자. 장식과 치장, 그러니까 색을 걷어내면 남는 건 본질, 즉 정신(精神)이다. 겨울에 봐야 하는 건 정신이다. 다른 계절에는 온통 화려한 색감의 풍경에 현혹돼 보지 못하지만 색이 사라진, 그러니까 형식과 치장이 사라진 겨울에는 그 너머가 잘 릴게임신천지 보인다. 장식이 사라지면 비로소 정신이 보인다. 그래서 앞서 단도직입적 발언을 이렇게 고쳐 쓴다. “겨울은 ‘여행하기 좋지 않은 계절이어서’ 여행하기 좋다.” # 겨울에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로 간다. 부여에서 내로라하는 백제의 대표적 유적 얘기는 빼놓기로 한다. 낙화암도, 정림사지도 안 간다. 손오공릴게임 사소하다거나 의미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건 다른 계절에 훨씬 더 잘 볼 수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부여는, 초여름을 추천한다. 부여를 대표하는 유적과 명소 얘기는 2년 전 초여름의 부여 기사(2024년 7월 11일자 ‘삼천궁녀 낙화암엔 애수의 노래… 궁남지선 연꽃의 초대’)로 갈음한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겨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들 야마토게임장 ’에 대한 얘기다. 계절에 따라 여행은 달라야 하는 법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좋은 여행지가 있지만, 겨울만은 예외다. 봄에 좋은 곳이 여름과 가을에도 좋은 곳은 많지만, 다른 계절만큼 겨울도 좋은 경우는 많지 않다는 얘기. 여행은 계절에 따라 목적지도 동선도 달라야 하는 법. 겨울에는 겨울 여행이 따로 있다. 부여에서 겨울에 보아야 할 건, 다른 계절에 가야 할 곳과 다르다. 다른 계절에 가면 좋은 곳을 겨울에 간다면 필시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 ‘좋은 계절에 왔더라면….’ 겨울 여행에서는 아예 시선을 바꾸는 것. 그게 외려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순백의 설산(雪山)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 겨울에 어울리는 곳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자연경관이 근사한 다른 계절에는 다른 걸 보느라 바빠 가보지 못하는 곳. 꽃 피고 볕 찬란한 계절이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 그런 곳이 겨울에 맞는 곳이다. 부여라고 해서 꼭 백제일 이유는 없다. 망했거나, 소외됐거나, 쓸쓸하거나, 슬프거나 한 곳. 또는 무언가를 지키려 홀로 애쓴 사람의 자취도 좋다. 이런 곳들에서는 뭔가 ‘정신’이 보인다. 백제의 시간도 있지만, 조선의 인물도 있고, 근대의 공간도 있으며, 폐부를 찌르는 시도 있다. 그렇게 옛 포구부터 시작해 시장, 절집, 사당, 국밥집까지 다녀왔다.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천왕문이 액자가 되고 그 안으로 소나무와 석등, 극락전이 일렬로 늘어섰다. # 의자왕을 배웅하다… 유왕산 부여에는 ‘양화면’이 있다. 부여에는 16개 읍면이 있지만, 부여를 여행하면 십중팔구 ‘부여읍’과 ‘규암면’만 가보는 것이다. 나머지 14개 면에는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는다. 그 ‘나머지’ 중에서도 양화면은 한결 더 외지고 허름하다. 그래서 구체적 설명이 더 필요하겠다. 양화면은 부여읍의 서남쪽에 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북 익산과 마주 본다. 양화면에서 웅포대교를 건너면 바로 익산이다. 양화면의 면 소재지는 입포다. 입포리는 본래 ‘갓개’라고 불리던 포구마을이었다. 뒷산이 갓을 닮았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이걸 한자로 바꾸면서 ‘삿갓 입(笠)’자에 ‘물가 포(浦)’자를 쓴 입포(笠浦)가 됐다. 한때 크게 번성했다는 포구 갓개 얘기는 뒤에서 다시. 양화면과 입포리까지 갔던 건 ‘유왕산(留王山)’ 때문이었다. 입포리 근처에 유왕산이 있다. 그곳이 겨울 부여 여행의 첫 목적지다. 유왕산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금강 변의 자그마한 언덕이다. 해발고도 67m에 불과하니까 사실 산이라 부를 수도 없다. 저 아래서 한 번 참은 숨으로, 단번에 다 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될 만큼 만만하다. 유왕산 정상에는 유왕정 현판을 건 팔각정자가 있다. 여기 올라서면 금강 물길이 발아래로 내려다뵌다. 이곳은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대신과 1만2807명의 포로를 싣고 당나라로 떠나는 배를 보며 백제 유민들이 통곡했던 곳이다. 비운의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마지막 뱃길을 보려 백제 유민들이 하얗게 이 산에 올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부여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지는 장면이 백제 패망을 영탄조로 보게 만든다면, 유왕산에서 백제 유민들이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장면에서는 원통함과 비장미가 넘친다. 정자 아래에 유왕산을 오르내렸을 백제 유민을 위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의 글을 읽는다.“…남편과 자식조차 만리타국 낯선 땅으로 끌려간… 마지막 보았던 그 서러운 눈빛… 눈물 젖은 저고리 앞섶 쥐어뜯으며….” 문장이 그려내는 건 나라 잃은 백성의 통한의 피눈물이다. # 의자왕 배웅과 며느리의 ‘반보기’ ‘반보기’라는 게 있다. 주로 충남 남부와 전북 북부 지역에서 전해지던 풍습. 시집간 딸이 친정 한번 가기 어려웠던 시절. 아주 가끔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특별휴가를 줘서 친정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는 걸 반보기라 했다. 주어진 날은 하루뿐. 친정까지 걸어서 오가는 시간을 빼면 친정어머니를 만나는 시간은 고작 반나절. ‘반나절만 본다’고 해서 ‘반보기’다. 반보기는 나중에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집단으로 모이는 세시풍속이 됐다. 부여에서 반보기가 행해지던 곳이 유왕산이었다. 일대의 부녀자들은 해마다 음력 8월 17일에 유왕산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놀이를 하며 하루를 즐겼다. 8월 17일. 의미심장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사비성이 함락된 날이 음력 7월 18일. 한 달 뒤쯤인 8월 15일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 석탑에다 자기의 전공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틀 뒤 소정방은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을 끌고 당나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날짜가 해마다 반보기를 하는 8월 17일이다. 백제 유민들의 통탄 속에서 왕을 배웅하며 지내던 제례 행사가 나중에 반보기가 됐을 것이란 추정이 나오는 이유다. 당나라로 떠났던 의자왕은 물론이고 함께 끌려간 백제 대신들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죽었다. 지금도 매년 추석 이틀 뒤인 음력 8월 17일 유왕산에서는 당나라로 압송돼 돌아오지 못한 혼령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향 추모제가 열린다. 1300년의 시간 저쪽에서 영혼을 불러내는 행사다. 유왕산에 오른 건 햇살이 슬쩍 기우는 오후 무렵이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금강의 물길을 오래 바라다봤다. 부여 홍산면의 관아 옆에 복원한 홍산현 객사. 객사의 당당한 규모가 과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 갓개 포구의 좋았던 시절 뒤로 밀쳐둔 ‘갓개’ 이야기를 해보자. 갓개, 그러니까 지금의 입포는 금강의 포구였다. 봄이면 우여(위어·葦魚)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이자, 강 너머 전북 익산의 웅포로 건네주던 한적하고 작은 나루터였던 것이, 금강 뱃길이 번성하면서 일약 부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구로 발돋움했다. 그 시절 입포는 장항, 강경, 안흥과 함께 ‘금강의 4대 포구’로 꼽혔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얘기다. 전성기 시절, 입포에는 많으면 하루 15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했다. 1932년부터는 금강에 정기여객선까지 다녔다. 강경에서 군산까지. 전체 운항 구간의 딱 중간쯤에 입포가 있었다. 어선과 운반선이 모이고, 정기여객선까지 다니면서 입포에는 자연스럽게 오일장이 섰다. 상인들은 군산과 강경에서 배에 싣고 온 물건을 입포장에 부렸고, 그 물건을 부여읍과 홍산, 은산 주민들이 사 갔다. 그 시절 입포는 부러울 게 없었다. 금강을 오가던 중선(中船) 배는 물론이고, 서해의 고기잡이 배까지 죄다 이 포구로 들어왔던 시절. 포구 골목에는 술을 팔고 잠을 재워주는 객줏집이 길게 늘어섰다. ‘아가씨’를 두고 장사하는 술집이 생겨났고, 색주가에서는 투전판도 벌어졌다. 사람이, 물건이, 돈이 넘쳐났다.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주된 ‘개도 지전(紙錢)을 물고 다닌다’는 이야기의 출발이 여기라는 얘기까지 있다. # 퇴락한 포구마을에 문 연 카페 지금 입포에는 과거의 영광은 자취도 없다. 식당 두 개, 미장원 두 개, 구멍가게 하나, 정육점 하나. 이게 입포리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다. 입포리의 인구는 다 긁어봐야 200명이 조금 넘으니까 이만한 것도 황송하달 수 있다. 이 정도 인구로는 잡화점 하나도 못 먹고 산다. 입포 가게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오로지 ‘떠나지 못해서’다. 이런 와중에 입포에 새로 문 연 카페가 있다. 전체가 비워진 낡은 건물 1층에다 따스한 불을 켰다. 레트로 느낌의 카페는 상호를 ‘노을’로 걸었다. 근사한 작명이다. 뉘엿뉘엿 쇠락해가는 포구마을에 ‘노을’이라니. 카페가 문을 연 건 올해로 3년째지만, 개업의 시기조차 가물가물한 늙은 가게들 사이에서 이 정도면 ‘신장개업’ 수준이다. 오일장이 사라진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입포의 정육점 상호는 아직도 ‘시장정육점’이니까.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이런 곳에서 카페가 장사가 될까. 형편을 묻는 조심스러운 질문에 커피를 내리던 주인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괜찮다”며 웃었다. 주민들도 간혹 오고 주말이면 간혹 외지인들도 찾는다는 얘기. 여기 카페를 낸 걸 보면 ‘돈 벌자’는 작정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적적하진 않을까. 주인은 “이렇게 심심하게 지내고 싶어서 온 거라 상관없다”며 또 한 번 웃었다. 입포는 이제 이렇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 이 얘기는 해야겠다. 입포리 화양면사무소에 20여 년 전쯤 세운 커다란 시비(詩碑)가 있다. 부여군의회 의원의 시를 새긴 비다. 별 기대가 없었는데 뜻밖에 뭉클하다. “…갓개 포구에 추적추적 겨울비가/비가 내린다/…/서돈짜리 금반지 팔아/딸자식 학자금 주어버린 내 어머니/서해 바다 뱃길이 보이는 산 중턱에 무덤 만들어 잠드셨는데…/생선 광주리 머리에 인 어머니가 부끄러워 숨어버렸던/철없던 딸자식/그날의 불효 용서조차 빌지 못해/빈 포구 바라보며/눈물 흘리고…/…” (김정은의 시(詩) ‘회상’ 부분) 시에 그려진 갓개의 시간은 번성했던 과거와 쇠락한 지금과의 사이쯤 어딘가에 있다. 그 시절 갓개에 눈물과 사연이 묻어 있는 듯했다. 그 얘기를 더 물을 수 없었던 건 시를 쓴 군의원이 작고해 어머니 곁으로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홍산 오일장의 식당 ‘할매순대’. 꾸미거나 가장하지 않아도 빛바랜 흑백사진의 레트로 느낌이다. # 무량사 지워진 단청과 품격 부여 외산면의 무량사는 고즈넉한 절집이다. ‘고즈넉하다’는 표현은 적절하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천년고찰인데도 무량사는 어쩐지 세상으로부터 홀대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찾아오는 이들도 적고, 신도도 많지 않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기도 대신 불사(佛事)에 여념 없는 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행락객으로 들썩이는 다른 대찰과 달리 절집 아래 사하촌마저도 ‘절간처럼’ 조용할 따름이다. 무량사에는 무심의 고요함이 고여 있다. 다른 계절도 마찬가지지만, 요즘 같은 겨울에는 더 그렇다. 고요하다 해도 기운이 차고 어둡다면, 무겁고 우울한 법. 무량사의 기운은 조용하면서도 따스하고 환하다. 이층법당 극락전은 겨울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등 뒤로 극락전을 두고 서면 쏟아지는 볕이 따스하다. 마치 맑고 화사한 위로 같다. 한 번이라도 가봤다면 모두 공감할 법한 이야기. 무량사에는 절집의 인상을 지배하는 ‘한 장의 이미지’가 있다. ‘액자가 된 천왕문 안쪽에 소나무와 함께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꽉 차게 들어오는 장면’이다. 절집의 미감을 말할 때 자주 거론하는 건 화선지 위로 먹이 번지는 수묵화다. 하지만 무량사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천왕문 앞에서 보는 미감은 어쩐지 서양화에 가깝다. 액자 안을 꽉 채우는 구도도, 색감도 그렇다. 무량사에서는 ‘지워진 색감’도 인상적이다. 일주문부터 법당에 이르기까지 무량사의 단청은 오래돼 탈색한 것처럼 바랬다. 색이 빠진 장엄(裝嚴)이 보여주는 건 우아한 기품이다. 흔히 백제의 미감이라 일컫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는 뜻의 ‘검이불루(儉而不陋)’를 떠올리게 한다. 무량사는 거기서 생을 마감한 매월당 김시습으로 더 특별하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머리 깎고 중이 돼 버렸다. 무도(無道)한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리고 한평생을 떠돌며 권세가들을 조롱하며 살았다. 금강산과 설악산 오세암, 경주 남산 등을 옮겨 다니며 흐르는 물처럼 살았던 김시습이, 마지막 생을 내려놓은 곳이 여기 무량사다. 무량사에서 무도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정신을 생각한다. ‘홍산삼층여관’ 입구에 그려진 벽화. 상호는 ‘삼층여관’이지만, 여관은 3층 건물의 2층에 있다. # 홍산면에서 근대를 탐험하다 무량사에 있던 김시습 초상화는 부여 홍산면으로 옮겨졌다. 초상화를 모시고 제를 지낸 걸 계기로 홍산면 교원리에는 조선 광해군 때 사당 ‘청일사(淸逸祠)’가 세워졌다. 죽은 김시습이 초상화를 따라 거기로 가서 사당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청일사에서 눈에 띈 건 익히 본 적 없는 비석이었다. ‘중수기(重修記) 겸 사문난적기(斯文亂賊記)’다. ‘사문난적’이란 유교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역적을 말한다. 비석에는 근래 일어난 ‘난적 사건’을 적어놓았는데 사건의 경위가 소상하다. 사당 운영비 마련을 위해 모금한 돈으로 논 950평을 매입한 게 사건의 시작. 사당 이름으로 등기를 낼 수 없어 총무의 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했는데 그가 사망한 뒤에 아들이, 어머니가 땅을 상속받도록 한 뒤 농협에 그 땅을 저당 잡혀 2600만 원을 빌려 갚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소송까지 가서 2006년 승소하긴 했지만, 무일푼이었던 총무의 아들에게서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사문난적기에서 느껴지는 건 요샛말로 ‘깊은 빡침’이다. 문장이 거침없고 거칠다. ‘천인공노할 도당’에 대한 저주는 “인수불해(人雖不害·사람이 해치지 않아도)나 천필륙지(天必戮之·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하리라”는 것이었다. 청일사가 있는 홍산면의 면 소재지 주변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면 소재지의 낡고 따스한 분위기가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겨울 아닌 다른 계절에도 일부러 가볼 만하다. 조선 시대 홍산현으로 현감이 다스리던 번듯한 고을이었던 홍산면에는, 관아와 객사가 남아 있다. 100년 전에 지은 홍산저포(모시)조합 건물이 있고, 장옥(場屋)이 옛 모습처럼 남아 있는 제법 큰 오일장도 있다. 홍산장의 ‘할매순대’는 한 세대 전 모습이라고 해도 믿을 법하다. 건물 입구 외벽에다 오래전의 여관 풍경을 동화책 삽화처럼 그려 넣은 ‘홍산 삼층여관’도 재미있다. 점심에만 장사를 하는 양식당 ‘홍산문화살롱’도 독특하다. 탐험하듯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겨울 여행의 목적지로 딱 좋은 곳이다. ■ 계백 동상 미스터리 부여를 대표하는 백제 위인은 계백이다. 부여군청 로터리에 계백 장군 동상이 있다. 처음 부여에 계백 동상이 세워진 건 1966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앞장서 만든 동상은 기상이 넘쳤다. 그런데 그 동상이 지금 부여에 없다. 1979년 10월 한쪽 손을 든 밋밋한 느낌의 새로 만든 동상으로 교체됐다. 이전 동상은 논산의 한 초등학교 교정으로 갔다. 누가 어떤 연유로 새 동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을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패장 계백이 승자 김유신보다 더 기세등등한 게 불편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부여군청 앞에 있다가 충남 논산 구자곡초 교정으로 옮겨진 계백 동상. 박경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