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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 [김종성 기자]
▲ 2019년 4월 26일 당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경호권이 발동된 국회 본관 의안과 앞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이날 새벽 의안과 출입문 개문을 위해 국회 경위들이 사용했던 쇠지렛대(일명 빠루)를 입수해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바다이야기게임다운로드 남소연 지난 20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이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과 관련해 나경원·송언석·황교안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폭력과 날치기 등으로 얼룩졌던 한국 국회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디딤돌이 될 만한 판결이다. 골드몽사이트 정치인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양상은 해방 이후에 본격화됐다. 임금 앞에서 어전회의를 하던 1910년 이전에는 정치가들이 그런 자리에서 심한 언쟁을 하는 일은 있어도 폭력을 행사하기는 곤란했다. 해방 직후의 정치 문화는 매우 폭력적이었다. 미군정과 극우세력은 대화와 타협이 아닌 테러와 학살을 통해 의지를 백경릴게임 관철시켰다. 이런 풍조가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정치인들을 거칠게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 의회 문화의 발달에 걸림돌이 됐다. 재떨이와 명패는 어쩌다 '무기'가 되었나 미군정을 뒤이은 제1공화국 때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뭔가가 날아다니는 일들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밀어붙일 때도 그랬다. 바다이야기고래1875년에 출생한 이승만은 37회 생일인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70세 때인 1945년 10월 12일이다. 33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던 그는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고 싶어 했다.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에 제정한 한글맞춤법에 대해 거부감을 품었던 것이다. 릴게임바다이야기예를 들면 '밥이'를 '바비'로 표기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그의 지론이다. 1950년 2월 3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잇다'와 '있다'가 무엇이 다른가?"라며 "문화를 진보시키려면 하로바삐 고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일 자 <조선일보>). 이런 논리에 따르면, '있다'와 '잊다'도 똑같이 발음되므로 굳이 ㅈ 받침을 쓸 필요가 없게 된다. '한글 간소화' 정책은 여론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것은 무조건 밀어붙일 사안이 아닌데도 이승만 정권은 강행했다. 자유당이 제3대 총선(1954.5.20)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뒤인 1954년 7월 7일, ㅈ·ㅌ·ㅋ·ㅌ·ㅍ·ㅎ 받침을 폐기하는 등의 한글 간소화 방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자유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토론 절차도 성급히 종결시켰다. 이것이 국회 폭력을 유발시켰다. 그달 12일 자 <동아일보> 보도다. "야당 측의 이인·김상돈·조영규·장택상 등 제군(諸君)으로부터 언권(言權)봉쇄라 하여 명패를 치고 재떨이를 까며 의사당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는 통에" 야당 의원들이 명패와 재떨이에 손을 대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뒤에야 토론 종결 결정이 취소됐다. 이듬해 9월 19일, 한글 간소화 방침은 결국 철회됐다. 당시 의사당에 비치된 재떨이는 유리 제품이었다. 명패도 재질이 단단했다. 그래서 얼마든지 흉기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물건들에 손대자 자유당이 당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국민 대부분이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에 분노하는 가운데, 이 협정의 비준안 심의가 시작된 1965년 8월 3일의 국회 회의장에서 치워진 물건들이 있다. 1948년 이래로 국회에 비치됐던 것과 비슷한 재질의 명패와 재떨이 등등이다. 다음날 <경향신문> 보도다. "시종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날 회의장의 기물은 모두 연질로 한 것이 특색. 재떨이는 알루미늄, 명패는 종이, 컵은 플래스틱 등으로 세심한 데까지 관심을 써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의원들 얼굴에는 상처가 안 나도록 배려." 1948년부터 1965년까지 17년간 국회를 지켜본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가 체득한 것은 유리 재떨이나 단단한 명패, 유리컵 등을 그곳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집권기의 국회 의사당에서 이런 물건들이 마구 날아다닌 데서 나온 '지혜'다. 그래서 알루미늄 재떨이, 종이 명패, 플라스틱컵 같은 연질 제품이 국회에 등장하게 됐다. 국회를 짓밟은 이승만, 문제의 근원이다 ▲ 조선일보 1958년 8월 20일 자 기사 '또 벌어진 국회유혈극'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회 기물들이 아직은 '경질(硬質)'이던 1958년 8월 19일, 여야는 연초전매법 개정안을 놓고 충돌했다. 단속 강화를 통해 재정 수입을 높이는 이 개정안에 대해 민주당은 급한 사안이 아니라며 상정을 반대했다. 다음날 <조선일보>에 따르면, 경남 진주 출신인 56세의 김용진 민주당 의원은 "벌칙을 강화해서 양담배 피우는 시민을 괴롭히려는 이런 개정안은 뒤로 돌려도 되지 않느냐?"라며 노발대발했다. 김용진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경남 의령 출신의 이영희 자유당 의원은 이 말을 듣고 "그런 독선이 어디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김용진이 "뭣이 어째?"라며 흥분하고, 이웃 지방 사람인 두 의원 간에 욕설과 호통이 오갔다. 이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는 서 있는 김용진과 앉아 있는 이영희가 각각 X와 O로 표시됐다. X와 O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던 중, 김용진이 좀전까지 커피가 들어 있었던 유리컵을 들더니 책상 위로 내리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다음에는 재떨이를 깨트린 뒤 던지려 했다.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이 유리 제품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는 명패를 집어 던졌다. 여덟 살 적은 이영희는 이 공격들을 모두 피했다. 번번이 '무기'를 든 쪽도 김용진이고, 피로 물든 것도 김용진이다. 유리컵과 재떨이를 내리칠 때 피가 났던 모양이다. 이 피는 같은 당 김훈 의원의 와이셔츠에도 묻고, 어이없는 폭력 사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던 36세의 서임수 의원(무소속)에게도 한 방울 튀었다고 위 기사는 보도했다. 의사당에서 무기를 드는 쪽은 아무래도 야당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다고 야당만 비난하기는 힘들다. 자유당이 국민 여론에 반하는 정책이나 법안을 수적 우위를 앞세워 무조건 밀어붙인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없애는 독선 정치가 이 시기의 의사당 폭력을 유발했다.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날치기 통과는 1952년의 위헌·불법 개헌(이른바 발췌개헌)이다. 이때 이승만은 군대(헌병)를 국회 폭력에 동원됐다. 의사당 내에서 홧김에 뭔가를 던지는 수준을 뛰어넘어,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짓밟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국회 폭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장본인이다. 1950년 전후의 야당 의원들은 1948년부터 여수·순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국 곳곳에서 이승만 정권이 반대세력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이승만 정권이 자신들을 향해서도 군대를 동원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공포심을 조장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에 대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던 그런 상황이 컵·명패·재떨이 등을 집어 들게 만든 배경이다. 야당의 행동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시기의 국회 폭력은 의회를 무시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이승만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낳은 산물이다. 미군정기의 테러와 학살 풍조로 폭력적 정치 문화가 조성된 상황에서, 정부수립 당시의 대통령마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의회를 폭력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이 국회로 끌어들인 폭력적 문화는 그 후의 한국 정치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