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볼거리를 내세운 쇼 뮤지컬이 쏟아지고 있는 연말. 반찬 없이도 맛있는 국밥처럼 담백하고 든든한 연극 한 편이 무대 위에 올랐다. 끓이면 끓일수록 진한 국물이 우러나는 맛이랄까.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이야기다.
인도계 미국 극작가 라지브 조지프의 희곡을 토대로 만든 이 연극은 2017년 초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만날 수 없었다. 많은 관객의 기다림에 부응하듯 8년 만에 돌아온 이번 시즌에는 이름만 들어도 든든해지는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휴마윤 역의 최재림·백석광, 바불 역의 이승주·박은석 배우다. 릴게임손오공 '햄릿', '헤다 가블러'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리는 연극계 대표 배우 이승주(44)와 '재림신'으로 누비던 뮤지컬 무대를 잠시 떠나 연극에 다시 도전하는 최재림 배우(40)를 최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만났다.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사이다쿨 '에서 타지마할을 등지고 보초를 서고 있는 바불(이승주)과 휴마윤(최재림) /사진=해븐프로덕션


눈빛과 호흡으로 채우는 2인극 
1648년 인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이승주 배우의 표현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잔혹동화" 같다. 두 주인공인 '휴마윤'과 '바불'은 세상에서 가 바다이야기오락실 장 아름다운 무덤인 '타지마할'을 등지고 새벽 보초를 서는 황실 말단 근위병. 이들은 "타지마할만큼 아름다운 것은 앞으로 영원히 만들 수 없다"는 황제의 명에 따라 타지마할을 짓는 데 참여한 2만 명의 손을 직접 자른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황제까지 죽일 기세인 바불과 그를 말리는 친구 휴마윤 사이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야마토릴게임
무대에는 타지마할을 나타내는 어떠한 장치도 없이 오로지 두 배우의 대사로만 채워진다. 이승주는 "연극을 계속 해왔지만 이번 작품처럼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오랜만이었다"며 "대본을 처음 읽자마자 굉장히 잘 쓰인 희곡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2017년 초연 당시 휴마윤 역을 맡았던 최재림은 "대본 자체가 굉장히 선명해 초연 야마토릴게임 때 욕심을 많이 냈는데 아쉬움도 컸다"며 "연기를 더 갈고 닦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뮤지컬 작품이 당분간 없는 시점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림은 이번이 두 번째 참여인 만큼 다각도에서 캐릭터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초연 때는 딱딱한 톤으로 원칙주의적인 휴마윤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이런 인물에도 아름다움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함께 표현하려고 한다"고 했다."휴마윤은 시스템에 순응하면서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이게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있는 인물이에요. 실제로 휴마윤의 영혼이 원했던 아름다움은 바불과 정글에서 3일간 지내면서 느꼈던 자연과 우정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에서 휴마윤 역을 맡은 배우 최재림. 그는 2017년 초연 이후 8년 만에 다시 휴마윤 역을 맡았다./사진=해븐프로덕션


바불은 휴마윤과 죽마고우지만 성향은 정반대다. 규율은 뒷전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목숨을 건다. 이승주는 바불에 대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교육을 받지 않아 오히려 맑은 눈으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편협한 시야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두 인물은 겉으론 완전히 다르지만 모순된 내면을 동시에 품은 '하나의 존재'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마치 주머니 어딘가에 사표를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단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유청 연출님이 연습 때 많이 했던 말처럼 두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규율밖에 모르는 것 같은 휴마윤의 마음속에도 다른 영혼이 있으니까요."(최재림)"휴마윤과 바불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죠."(이승주) 
두 배우의 마음을 울린 대사는 뭘까. 이승주는 바불이 줄곧 외치는 "아름다움은 영원해야 해"를 꼽았다. 최재림은 1장 말미에 나오는 바불의 대사를 언급했다. "바불이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뒤를 돌기 전, 황제가 기뻐하지 않아도 별을 향해 날아갈 거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돈, 명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고 인간은 정말 작은 존재잖아요. 그런데 그 작은 존재들이 최선을 다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저한텐 '인생 예찬'으로 다가와요."
몸을 갈아넣는 두 간판 배우
이번 공연의 깨알 같은 관람 포인트 중 하나는 뮤지컬 무대에선 쉽게 들을 수 없는 최재림의 즉흥 허밍(콧노래)이다. 최재림은 "휴마윤이 바불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바불이 다시 옷을 입는 장면인데 그때 흐르는 배경음악에 맞춰 그날그날 즉흥으로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승주는 감탄과 뿌듯함이 섞인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너무 퀄리티가 좋죠. 가끔은 재림이 노래를 더 듣고 싶어서 옷을 천천히 입어야 하나 싶을 정도예요."(웃음)
4만 개의 손을 자른 휴마윤과 바불이 사방에 튄 핏물을 닦아내는 장면은 강한 몰입감과 동시에 관객의 걱정을 부른다. 실제 피 대신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무릎은 괜찮은 걸까' 걱정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이에 이승주는 "바불이 휴마윤과 함께 처절함을 겪고 있다는 일체감이 들면서 이상하게 공연 중에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힘든 건 공연이 끝나고 나서예요. 재림이도 저도 지금 무릎이 새까맣게 됐거든요."
"공연 중에는 몸이 뜨거워져 춥지 않다"던 최재림도 "공연 끝나면 무릎이 원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지, '옻칠'이 돼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시종일관 진지한 답변을 이어가던 두 배우의 너스레가 휴마윤이 마음속 깊숙이 간직한 무구한 모습을 닮은 듯했다.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 만난 두 배우는 고정 파트너로 무대에 오른다. 이미 오래된 파트너처럼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상대의 장점을 하나씩 꼽아달라고 했다. "승주 형은 워낙 베테랑이라 제가 뭘 던져도 다 받아줘요. 그래서 연습실에서 거리낌 없이 많은 걸 시도해볼 수 있었고, 형의 리액션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받고 방향도 잡을 수 있었죠. 형은 상대가 주는 자극을 몸과 마음을 모두 열어 받아들이고, 그걸 다시 연기로 투영해내는 배우예요. 그래서 모든 장면이 정말 잘 살아나요."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에서 바불 역을 맡은 배우 이승주. 연극계 대표 배우인 그는 이번 시즌에 처음 출연한다./사진=해븐프로덕션


이승주는 최재림의 '신뢰감'을 꼽았다. "재림이는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연극 경험은 제가 더 많지만 오히려 신뢰를 줘요. 무대 위에서 이렇게 강한 안정감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예요. 이 작품은 무언가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배우의 정확한 화술과 감정 표현으로 관객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재림이가 그걸 잘 해줘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서로 역할을 바꾼다면 어떤 그림이 탄생할까. 최재림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바불을 연기해보고 싶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바불과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 자체가 바불과 굉장히 거리가 멀거든요." 그의 말을 이승주가 맞받았다. "그런데 제가 봤을 땐 재림이가 굉장히 유쾌하고 장난기 있는 모습도 있어서 바불 역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웃음)
이 작품은 아름다움을 넘어 많은 것을 말한다. 권력, 신념, 우정, 양심 등 관객마다 느끼는 바가 제각각이다. "작품은 정답을 주지 않아요. 거기서 많은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같은 걸 바라보지만 접근 방식은 다른 두 인물을 보여주면서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래요?' 라고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죠. 공연을 함께 본 친구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최재림)
"재연까지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3연을 할 수 있을지도 사실 미지수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관객들이 함께 많이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이승주)
공연은 내년 1월 4일까지.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