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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이번 기사는 비교적 낯선 릴게임한국 인명이 여럿 등장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쉽게 풀어내기 위해 애썼는데,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단히 갈고 닦겠습니다. ‘광녀’ 후아나의 탄생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일부 확대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 1877, 캔버스에 유채, 340x500cm, 프라도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이런 표정은 어떤 일을 겪어야 지을 수 있는가. 상복 입은 여인이 바라보는 건 관(棺). 그 안에는, 필생의 사랑이라 부른 남편이 죽어있다. 그녀는 얼마 가지도 못한 운구 행렬을 또 멈춰 세 바다이야기비밀코드 운다. 촛대 위 촛불을 올리고, 마른 가지로 매캐한 연기를 피운다. 사제를 앉힌 뒤, 책을 펼쳐 기도문도 읊게 한다. 그런 뒤 여인은 관 앞에 우두커니 선다. 눈물을 쏟는 한편, 수천 번 되새긴 소망도 재차 중얼거려본다.살아서 돌아와달라고. 얼마 전 수도사도 말하지 않았는가. 관 속 눕혀진 채 꼼짝없이 땅에 묻힌, 그러곤 장사까지 지낸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야마토게임예시 걸 봤다고. 여인은 그 기적이 본인 남편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그녀만의 소망일 뿐이다. 여인 주위 모든 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졸고, 딴청을 피우고, 이 짓 자체가 한심하다는 듯 대놓고 노려보기도 한다. 하늘은 흐리다. 뿌연 연기가 하늘을 더 흐리게 한다. 땅은 황량하고, 나무는 앙상하고, 저 멀리 바다이야기룰 보이는 마을도 삭막해보인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이 오르티스(Francisco Pradilla y Ortiz·1848~1921)의 그림,<‘광녀’ 후아나>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 1877, 캔버스에 유채, 340x500cm, 프라도 미술관 그림 제목 그대로 여인 이름은 후아나 1세(Juana I·1479~1555). 이름 앞에 왜 ‘광녀’라는 말이 붙었는지는 화폭이 여실히 보여준다. 후아나 1세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이자, 아라곤 연합 왕국(두 왕국은 지금의 스페인 일대)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카리스마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지략가 왕 페란도 2세. 이러한 ‘부부 왕’을 부모로 둔, 고귀하고도 고결한 혈통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 눈부신 배경만 보면, 사실 그녀에게 광녀만큼 어울리지 않는 별명도 없었다. 분명, 분명 그랬는데…. 운명이자 의무 ‘혼인 동맹’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후아나 1세의 부모)의 결혼 초상화, 15세기경 후아나 1세(즉위 전 호칭은 후아나 공주)는 1479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땅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 후안이 있었다. 어머니 이름을 따른 언니 이사벨도 있었다. 이어 밑으로 동생 마리아와 카탈리나도 줄줄이 출생했다. 당연히 오빠와 언니가 왕위 계승 서열상으로 위였다. 웬만한 돌발 상황이 있지 않고서야 그녀가 왕관을 쓸 일은 없어보였다. 다만, 그렇다고 후아나 1세의 역할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곧장 외교판에 올라서야 했다. 최적 상대와 ‘전략적’ 결혼에 나서 혼인 동맹을 이끌 것.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임무였다. 그녀의 결혼 상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남왕(미남공)’ 펠리페 1세(즉위 전 호칭은 필리프 또는 관습상 ‘부르고뉴 공국 필리프 4세’)였다. 이때가 1496년, 그녀가 열일곱 살 때였다. 당시 후아나 1세의 부모, 즉 ‘부부 왕’이 통치한 연합 왕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날이 힘을 불리는 프랑스 때문이었다. 그 나라는 어느덧 군세를 키워 이탈리아까지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대포를 끌고와 피렌체와 나폴리를 휘젓는, 옆에서 보기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행보 또한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화가(Master of Affligem), 브뤼셀 성 정원에 있는 펠리페 1세(필리프)와 후아나 1세(후아나 공주), 1495~1506, 벨기에 왕립 미술관 후아나 1세와 펠리페 1세의 결혼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즉 두 사람의 결혼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후아나 1세), 아울러 합스부르크 왕가 세력(펠리페 1세) 사이 규합을 위한 마중물이었다. 커다란 두 땅덩어리의 결합. 이는 날뛰려는 프랑스를 양옆에서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건을 갖춘 ‘선남선녀’ 작자미상, 후아나 1세의 초상화(어린 시절), 16~17세기경, 패널에 유채, 27x18cm, 위치불명 혼인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배우자의 나라, 그곳 국민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이다. 후아나 1세는 그런 점에서 준비된 신부였다. 그녀는 꽤 왕족다웠다. 표정은 약간 침울했지만, 외모 자체는 해사한 편이었다. 이는 금발과 흰 피부의 미인상이었던 어머니 영향이 컸을 것이다. 교양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철학자 세네카부터 성 제롬,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책을 읽었다. 외국어에도 능통했고, 자수와 요리 등 손재주 또한 좋았다. 춤, 악기연주, 승마, 매사냥 등도 능숙히 할 수 있었다. 성격은 대체로 조용하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 성향은 특유의 음울한 인상과 맞물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그녀의 남편 펠리페 1세도 ‘미남왕’이라는 별명답게 훤칠했다. 그는 코가 높고 체격이 좋았다. 소년 같은 분위기에 쾌활한 성격까지 있었다고 한다. 후안 데 플란데스, 미남왕(공) 펠리페 1세(필리프), 1496~1500, 패널에 유채, 30x19.3cm, 빈 미술사 박물관. 당시와 요즘의 미적 기준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이처럼 둘은 특별한 핏줄 말고도 괜찮은 조건을 두루 갖췄다. 부부 사이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특히나 후아나 1세가 남편을 깊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각 세력의 국민 입장에선 이들 관계를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는 듯했다. 이대로 관계만 잘 이어간다면, 두 사람은 적당한 부와 권력을 안정적으로 안고 갈 수 있을 터였는데…. 실상은… 고성과 울음의 연속 루이스 갤라이트, ‘광녀’ 후아나, 18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29x103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역사는 종종 천 년 묵은 희곡보다도 극적으로 흐른다. 가장 큰 문제는 후아나 1세의 남편, 펠리페 1세의 바람기였다. 후아나 1세는 펠리페 1세가 수많은 여자와 놀아나는 걸 거듭 지켜봐야 했다. 후아나 1세는 펠리페 1세가 밖으로 나돌수록 그에게 더 집착했다. 남편에게 울며 애원하고, 하루는 내연녀 하나를 붙잡아 죽도록 매질도 가하기도 했다. 그녀의 음울한 표정에는 불안증이 스며 있었다. 감정 기복도 깃들어 있었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촘촘히 박혀 있었다. 지금껏 그 마음을 나름대로 잘 잠재우고 있었건만, 남편의 병적 외도가 이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것들은 아집과 만성적 신경쇠약으로 몸집을 키우고 말았다. 후아나 1세와 펠리페 1세는 평생 2남 4녀를 뒀다. 그중 후아나 1세는 스물한 살이 된 1500년에 둘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를 낳았다. 이쯤부터는 후아나 1세가 광증(狂症)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무렵 그녀는 정치에도, 자식 교육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독하게 매달리는 건 오직 하나, 그놈의 펠리페 1세뿐이었다. 펠리페 1세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에겐 그럴 눈치도, 의지도 없어보였다. 필요한 건 둘 사이 진솔한 대화였는데, 정작 오가는 건 고성과 울음뿐이었다. 다만 두 사람 다 거듭 싸울지언정 연을 끊을 생각은 없었다. 양가 어른은 여기서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 혼인 동맹만큼은 이어질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역사의 요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후아나 1세의 오빠,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후안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바로 밑 서열의 언니 이사벨도 예상치 못한 이른 죽음을 맞았다.그렇다면 그 아래는… 후아나 1세. 즉 나날이 불안정해지고 있는 그녀가, 느닷없이 광활한 영토의 상속녀가 되고 만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여왕 즉위 에마누엘 로이체, 여왕 앞 콜럼버스(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가 그려져 있다), 1843, 96.5x127cm, 브루클린 박물관 격동의 시계는 멈추질 않는다. 1504년, 이번에는 여왕 이사벨 1세가 죽었다. 향년 쉰세 살이었다. 그녀의 딸 후아나 1세는 이제 막 스물다섯이 된 때였다. 여왕 어머니가 죽고 계승자 오빠와 언니 또한 다 요절했기에, 이제 그녀가 여왕 직에 올라야 했다. ‘여왕 후아나 1세’의 탄생이었다. 에마누엘 로이체, 여왕 앞 콜럼버스(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가 그려져 있다), 1843, 96.5x127cm, 브루클린 박물관 문제가 곧장 고개를 들었다. 이사벨 1세와 ‘부부 왕’의 균형을 맞췄던 또 다른 한 축, 페란도 2세. 그러니까 죽은 이사벨 1세의 남편이자, 이제 막 여왕이 된 후아나 1세의 아버지. 그는 아내를 잃었지만, 여전히 왕으로는 건재한 듯보였다. 페란도 2세는 계속해 권력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외려 이번 일을 권력 확장의 기회로 봤을 터였다.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그간 각자 영역에서 비교적 동등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드셌던 아내 이사벨 1세와 비교하면 유약한 딸인 후아나 1세쯤이야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아울러 그렇게만 되면, 그는 사실상 ‘단독 왕’이 돼 온 국정을 휘어잡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페란도 2세의 자리를 노리는 이가 있었다.후아나 1세의 남편, 바람둥이 펠리페 1세였다.갑작스럽지만, 어쨌건 아내가 여왕에 오른 만큼, 나 또한 왕이 되는 게 순리이지 않은가. 펠리페 1세의 생각은 이렇지 않았을까 한다. 장인 페란도 2세와 사위 펠리페 1세. 둘은 누가 더 ‘불안정한 정신의’ 여왕 후아나 1세를 잘 이끌 수 있을지를 놓고 수싸움을 했다. 장인과 사위의 다툼 중 승자는 사위 펠리페 1세였다. 어쩌면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 부부 왕에 이어, 후아나 1세와 펠리페 1세의 부부 왕 시대도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 ‘어쩌면’의 미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생의 사랑마저 떠나고… 가브리엘 마우레타 아라실, ‘광녀 ’ 후아나, 1858년경, 캔버스에 유채, 118x145cm, 프라도 미술관 1506년, 9월.펠리페 1세가 죽었다. 갑작스럽게. 이는 그가 장인 페란도 2세와의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한 후 얼마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후아나 1세와 사실상 공동왕으로 즉위한 뒤 고작 2개월 만에 빚어진 돌발 상황이었다.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다. 사인으로는 장티푸스가 꼽힌다. 당시에는 권력 쟁투에서 밀린 페란도 2세가 몰래 독을 먹였다는 소문도 돌긴 했다. ‘만들어진’ 광기의 순간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스케치), 1877, 캔버스에 유채, 340x500cm, 프라도 미술관 이쯤 다시 후아나 1세로 초점을 맞춰보자. 여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넋을 놓고 산 후아나 1세는, 남편 펠리페 1세가 그렇게 갑자기 죽자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사적으로는 버러지 같은 난봉꾼이었다고 한들,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그럴수록 펠리페 1세를 더 사랑했다. 그의 모든 것에 더 집착했다. 남편에 대한 아집만은 어느덧 망집이 될 만큼 덩치를 불렸었다. 그것은 여러모로… 서글프고도 갑갑하고, 안쓰럽고도 텁텁한 일이었다. 후아나 1세가 앞장선 남편 펠리페 1세의 운구 행렬은 이때부터 이뤄진 것이다. 후아나 1세는 펠리페 1세의 시신이 그라나다 대성당에 놓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곳에는 왕실 묘역(그녀의 어머니 이사벨 1세도 여기에 묻혔다)이 있었다. 그도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 왕이었던 만큼, 이에 걸맞은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지금 있는 곳이 부르고스였다는 것이다. 부르고스가 어딘가.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그라나다는? 반대로 남쪽 끝에 있었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일부 확대), 1877, 캔버스에 유채, 340x500cm, 프라도 미술관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일부 확대), 1877, 캔버스에 유채, 340x500cm, 프라도 미술관 후아나 1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움직였다. 무작정 관을 끌고자 했다. 관리와 시종도 어쩔 수 없이 동참했다. 이후에는 여러 전설 같은 말이 따라붙는다. 그녀가 낮 아닌 밤에만 움직이고, 잠들기 전이면 매번 관을 열고선 시신을 안았으며, 그 과정 중 다른 여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앞서 소개한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이 오르티스의 그림, <‘광녀’ 후아나>의 장면처럼 수시로 주술 의식을 벌였다는 말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광녀가 되고 만 것일까. 결론부터 보면, 시신을 향한 강박과 주술에 대한 집착 등 행적 대부분은 후대에 각색(脚色)됐을 가능성이 크다. 후아나 1세에겐 분명 광증처럼 보이는 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집을 부려 관과 함께 길을 나선 일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마저도 ‘아주 짧은’ 기간이었을 뿐, 북쪽에서 머나먼 남쪽 길 끝까지 가로지르는 일은 없었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물러났던 父가 돌아오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즈, 딸과 함께 토르데실라스에 사는 ‘미친 여왕’ 후아나 1세(일부 확대), 1906, 캔버스에 유채, 85x146cm, 프라도 미술관 이런 가운데, 끝난 줄 알았던 ‘왕좌의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패자는 있지만, 영원한 패자는 없다. 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정치판의 격언이다. 이사벨 1세가 죽은 후 생긴 공백. 이를 우여곡절 끝에 펠리페 1세가 채우는가 했지만, 그의 요절로 또 공백. 그렇다면 그 빈자리는 누가 채웠는가. 펠리페 1세에게 밀려 잠시 물러났던 사람, 페란도 2세가 ‘부활’했다.내 딸, 후아나 1세 여왕의 광기는 이제 다 알지 않느냐. 나는 아비가 된 입장으로 그녀를 돌보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페란도 2세의 입장은 이것이었다. 다른 방편이 없었다. 그 결과, 페란도 2세가 섭정(攝政·군주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으로 재차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화려한 귀환이었다. 페란도 2세는 이번에야말로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생각이었으리라. 울타리 밖이 얼마나 추운지는 이미 뼛속 깊이 체감했을 터였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즈, 딸과 함께 토르데실라스에 사는 ‘미친 여왕’ 후아나 1세, 1906, 캔버스에 유채, 85x146cm, 프라도 미술관 그는 그래서 더 냉정해졌을 것이다. 1509년. 그는후아나 1세를 토르데시야스 왕궁에 두고, 사실상 감금한다. 후아나 1세는 이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1555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그사이, 페란도 2세는 섭정 아닌 사실상 왕으로 입지를 재차 다질 수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이런 행보를 놓고 해명을 하긴 했다. “여왕을 보호해야 하는 섭정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의 주장은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조치가 정신이 불안정한 후아나 1세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사꾼 무리와 떨어뜨리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목적은 그뿐이었을지. 사실상 감금된 여왕 후안 데 플란데스, 후아나 1세의 초상화, 1500년경, 패널에 유채, 36x26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렇게 유폐된 여왕, 후아나 1세. 그녀는 여전히 여왕이었지만, 더는 여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 곁에는 막내딸 카탈리나(훗날 포르투갈 왕궁의 왕비)와 몇 안 되는 수녀들뿐이었다. 후아나 1세의 상태는 그곳에서 점점 더 악화했다. 언젠가부터는 자고, 씻고, 옷을 갈아입기조차 힘들어했다고 한다. 음식은 문밖에 놔둬야 했는데, 누군가 보고 있으면 먹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또 흘러 1516년, 후아나 1세를 구석으로 내몬 페란도 2세가 죽었다. 향년 예순넷 나이였다. 그렇게 페란도 2세의 자리가 또 비었다. 후아나 1세의 아들(장남), 카를 5세. 지금껏 고모 등 다른 이에게 길러진 그가 서열상 그곳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명목상이라고 한들, 어머니 후아나 1세와 아들 카를 5세의 공동 통치였다. 할아버지 페란도 2세에 이어 새롭게 왕이 된 카를 5세는, 지금껏 감금 생활을 한 어머니를 딱하게 보지는 않았을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를 빼내 나란히 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카를 5세 또한 페란도 2세가 그랬듯, 어머니 후아나 1세를 거기에 그대로 뒀다. 카를 5세는 유폐된 후아나 1세를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다. 상태도 살펴보고, 대화도 짧게나마 주고받았다. 그런 뒤 내린 결론은… “당신들이 바람직하게 해야 할 일이 있소. 누구도 폐하(후아나 1세)와 대화하지 못하게 해야 하오. 그렇게 하면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오.” 시종에게 이런 말이나 한 후 물러섰다고 한다. 여왕이자 어머니, 후아나 1세를 그대로 놔둔 채. 그녀는 광인인가, 그저 희생양인가 샤를 드 스튜벤, ‘미남왕’ 필리프의 부활을 기다리는 ‘광녀’ 후아나, 1836, 캔버스에 유채, 320x370cm, 릴 미술관 후아나 1세는 1555년 4월, 그곳 왕궁에서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일흔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그라나다 대성당에 묻혔다. 거기에는 강골의 어머니 이사벨 1세 여왕, 본인을 구석으로 내몬 냉혈한 아버지 페란도 2세 왕이 잠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쨌건 생을 다해 미친 듯 사랑했던 남편 펠리페 1세도 긴 기간 누워 있었다. 후아나 1세는 본인 별명처럼 정말 광인이었을까. 그저 남편의 난봉질, 아울러 뜻하지 않게 벌어진 권력 싸움에 희생된 서글픈 여인이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광증은 어느 정도였는지, 애초에 광기를 품었는지를 놓고도 지금껏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원래도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지만, 그게 ‘미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이러한 상태는 외려 기나긴 유폐 생활을 겪으며 나빠졌고, 그 결과 정신 건강에 중대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역사학자 베타니 아람(Bethany Aram) 등은 위와 같은 취지의 분석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시대에 알려진 그녀의 답도 없는 광기 사례 중 상당수는 가공된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일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비센테 팔마롤리, ‘광녀’ 후아나, 1884~1885, 캔버스에 유채, 78x109cm, 프라도 미술관 후아나 1세는 다혈질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정열적일 때도 분명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게 많은 점 또한 사실이었다. 짧게나마 국정 운영도 했고, 기록에 따르면 나름의 ‘정치인스러운’ 모습도 꽤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과 권력이 유독 매몰찼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는 없다. 돌아와 또 한 번 정리하자면, 그녀는 광인인가. 희생양인가. 그녀가 역사에 대고 말할 수 있다면, 억울하고 한스러운 일 딱 하나만 말할 기회를 얻는다면 어떤 이야기부터 풀어놓을까. 참고자료 Aram, Bethany. Juana the Mad: Sovereignty and Dynasty in Renaissance Europ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Gelardi, Julia P. In Triumph‘s Wake: Royal Mothers, Tragic Daughters, and the Price They Paid for Glory. New York: St. Martin’s Griffin 기자 admin@slotmega.info |